옛 그림의 가치는 무엇일까?
한국화란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통적인 기법을 가지고 그린 그림을 의미한다. 옛 그림에서 보여지는 가치는 무엇이 있을까? 옛 그림을 감상하기 전에 어떤 관점으로 보아야 쉽고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는 옛 그림을 감상할 때 무엇을 그렸고, 왜 그렸으며, 누가 그렸는지를 알아보며 그림속 이야기를 풀어가길 바라는 작가의 뜻이 쓰여져있다.
어떠한 그림을 그릴 때에는 다양한 정신이 담겨져 있다. 한국화에 산수화가 많이 그려지는 이유는 조선 선비들의 정신적 이상향이 담겨져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강세황의 <<강상조어도 江上釣魚圖>>에서는 자유로운 생활을 꿈꾸고 있던 문인의 모습이 그림에 그려져있다. 멀리 큰 산이 보이고, 강가 주변에 나무들 사이로는 작은 마을이 보인다. 강가 작은 언덕에는 큰 나무 몇그루가 있다. 고요해 보이는 강가에는 작은 배가 떠 있고, 한 사람이 한가롭게 낚시를 즐기고 있다. 어쩌면 그 사람이 강세황 자신이길 바랐던 것일까? 그림 우측 상단에는 <구름 걸린 나뭇가지 담백한 기운이 머물고 더운 기운 피어오르는 산허리 더욱 푸르네> 라고 쓰여있다. 당시 조선은 양반 중심인 계급이 있는 사회였다. 양반은 문인, 무인을 통칭하지만 시대가 점차 흐르면서 문인 계층을 가리는 말로 굳어졌다. 양반들은 사회 지배층으로서 모범이 되어야했고, 끊임없이 학문에 열중해야했고, 정치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자신의 가문을 지켜야하는 압박감도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그러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한가하고 자유로운 전원생활을 꿈꾸었을까 생각이든다. 그러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그림에 녹아들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화는 그리는 이의 마음을 중시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희망, 행복, 장수, 다산 등을 바라는 마음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다. 김홍도의 <<모당평생도慕堂平生圖>>를 살펴보자. 그림속 주인공인 '홍이상'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기념할 만한 경사스런 일을 선별하여 그린 풍속화이다. 8첩 병풍에 돌잔치, 혼인식, 삼일유가, 최초 벼슬길, 관찰사부임, 판서행차, 정승행차, 회혼례 등을 그려 넣었다. 당시 양반들의 큰 바람은 자손많은 가정에서 평탄한 공직 생활을 하며 건강히 오래 사는 것이 최고의 복이였을 것이다.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마음이다. 이런 이상적인 삶을 그려서 집안에 놓아 자손들이 좋은 기운을 얻길 바라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한국화는 독창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그림은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점차 우리나라 만의 화풍이 자리잡았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예를 들어본다. '안평대군'이 꿈에 도원에서 본 광경을 안견에게 말하여 그리게 한 것이다. 왼편의 현실세계와 오른편의 도원세계가 대조를 이루고, 몇 개의 경관이 따로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큰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 왼편의 현실세계는 정면에서 보고 그렸으나 오른편의 도원세계는 부감법을 구사하였다. (부감법이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풍경을 그리는 방법으로 특히 동아시아 회화에서 자주 사용된 표현기법이다.) 이 그림이 명작인 이유는 산을 웅장하고 입체적으로 그리면서 바위를 먹색으로 짙고 흐리게 색 칠하여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였고, 아래쪽 바위산을 쭉 그려놓아 높은 산과 절벽이 마을을 아늑하게 감싸은 느낌을 나게 하였다. 꿈속의 느낌을 표현한 상상력이 풍부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감상이나 장식 외에도 특정 목적으로 그린 그림도 있다. 그림은 기록의 수단이기도 했다. 궁중에서의 일, 문인들의 모임, 초상화, 성안의 풍경 등도 기록의 수단으로 그려졌다. 초상화로 예를 들자면, 외국도 초상화는 발달했으나, 전신 중 일부인 얼굴에만 집중적으로 그렸던 것에 비해 우리나라 옛 초상화는 당시 유교 정신까지 담아내어 그렸다. 그냥 단순 초상화가 아니라 학문연구와 학자에 대해 존경심을 표현하기 위해 서원에 놓아야 했다. 각 서원마다 보이지않는 경쟁심으로 최고의 솜씨를 가 진 화가에게 초상화를 맡겼을 것이다.
하지만 잘 그린 초상화란 무엇일까? 단순히 사진처럼 그대로 그린 것이나 화려한 기법으로 잘 생기게 그린 것은 아닐 것이다. 이명기, 김홍도의 <<서직수의 초상>>의 뒷이야기가 있었다. '서직수'는 자신의 초상화를 최고의 화가 두명에게 맡겨 '속되지 않고 고귀한 모습'이 담긴 정신까지 표현해주길 바랐지만, 외양만 잘그린 그림이라고 불만이었다고 한다. 그 불만은 초상화 우측 상단에 직접 쓴 글에 나타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그림은 초상화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한다. 서있는 자세, 흰 옷과 버선의 아름답고 부드러운 선, 큰 코와 입술 등에 단정하고 위엄이 가득한 그림이다.
초상화는 의뢰인이 요구할 때 마치 사진 이상으로 여겨졌을테니 꽤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박물관과 미술관에 가고 싶어지네
책으로만 그림을 접하고 있으니 직접 보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든다. 게임이나 경기도 규칙을 알고 봐야 재미를 느껴 집중할 수 있듯이 그림도 마찬가지다. 특히 비슷해 보이고 색도 단조로워서 지루할 수 있는 우리 옛 그림은 감상법을 약간이라도 알고 가면 더욱 흥미 있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삶을 이해하면 더 이상 어려운 그림이 아니고, 가깝게 느껴지기도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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